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수필] '매디슨카운티의 다리'를 읽고

다이어리

by yaoya 2022. 2. 5. 21:55

본문

의외로 여지껏 소설같은것 한번도 읽어본적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더욱이 나처럼 나이든 사람으로부터 그런 소릴 자주 듣는데, 그럴때면 난 그 사람의 지난 세월이 아깝고 송구스럽기까지 하다. 책에서 얻어지는 그 굉장한 것들은 차치하고라도, 비오는 날의 오후라던가 남편의 귀가를 기다리는 늦은 시각에 클래식 음악을 볼륨을 낮추어 틀어놓고 책을 펴들었을 때 온몸에 파고드는 행복감이란 진정 맛보지않은 사람은 상상도 하지 못할것이다.  

나는 책에 미친 두 오빠 덕으로 어려서부터 책과 가까이 했다. 중학교 일학년 때 "뇌우"라는 중국소설을 멋모르고 읽다가 큰오빠에게 혼줄이 난적도 있었고 고등학생이 "걸리버여행기"를 빌려 본다고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 아무튼 난 잡독을 한다. 요즈음도 아이들이 사들이는 추리소설까지 빼놓지 않고 읽는데, 딸아이가 사온 이 책을 읽은것도 그저 눈앞에 이 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딸아이의 출근 후 청소를 하려고 그 애 방에 들어갔다가 침대머리맡에 놓인 이 책을 발견하고 무심히 집어들었다. 첫 페이지를 훑어보면서 "이건 좀 색다른 심리추린가" 하는 지레짐작과 함께 약간의 호기심으로 페이지를 넘기면서 침대에 걸터앉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시장끼가 들어 정신을 차려보니 난 딸아이의 침대에 편안하게 누워 1960년대 빌리 와일더 감독의 미국 영화 한편을 보고있는듯한 착각에 빠져있었던 것이다....

-----극장의 불이 꺼지면 스크린 가득히 미국 서부 산악지대의 매혹적인 풍경이 펼쳐지고 한 낡은 픽엎트럭이 까마득히 먼곳에서 점점 앞으로 달려나온다. 음악과 함께 자막이 흐르고, 트럭이 스크린을 가득 메우면 운전석에서 카메라를 멘 중년 남자가 천천히 내린다. 주인공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해리슨 포드로 정했다. 주인공의 성격묘사를 하기 위해 여러장의 컷이 필요하겠지. 농구와 풋볼과 계집아이밖에 모르는 미국 사내아이들과는 다른, 영리하면서도 고독한, 예술성이 엿보이던 별난 구석이 있는 아이, 그리고 자라서 카메라맨이 되는 과정을 군대생활과 뉴욕 파리 등지를 클로즈업하면서 나타낸다. 드디어 트럭은 매디슨 카운티로 들어서고, 다리까지 가는 길을 묻기 위해 현관 앞에 앉아있는 한 여인 앞으로 다가간다.

갑자기 신이 바뀌어 67번째 생일을 맞이한 할머니가 쓸쓸히 비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밖은 어둑어둑해지고, 그녀는 천천히 호두나무 책상 속에서 마닐라 봉투를 꺼낸다. 그 속에서 나온 두 장의 사진과 짤막한 글. 친애하는 프란체스카, (편지를 읽는 그녀의 연기에 얼마나 감정이 깃들여 있는가에 따라서 이 영화의 승패가 달려있겠지.) 몸에 꼭 끼는 물 빠진 청바지에 하얀 티셔츠를 입은, 바람에 흩날리는 긴머리를 한 여인의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회상에 잠기는 여주인공-----

이 두 남녀의 사랑은 우리에게 삶의 의미 같은것을 느끼게 해준다. 인간이라면, 더욱이 여자라면 누구나 이런 사랑을 갈망하고 있으리라. 자신이 겪었던 아주 엷은 사랑마저도 모두 이러한 사랑으로 승화시키고 싶을 것이다. 숙명적이랄 수밖에 없는 진지하고 격정적인 사랑, 그 사랑을 더욱 절실하게 만들어주는것이 지붕덮인 다리가 있는 작은 고을과, 닷새라는 제한된 시간인것이다. 처음 만남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저 가슴밑바닥에 숨어있어 스스로도 까맣게 잊고 있던 사랑의 불길을 애써 이성으로 누르면서 의연하게 행동하는 프란체스카의 모습에서 성숙한 여인의 지적인 분위기를 맛본다. 킨케이드가 떠나고 난 뒤 화장대 앞에 알몸으로 서서 자신의 외면과 내면을 한꺼번에 꽤뚫어보는 프란체스카, 이윽고 그녀는 쪽지에 편지를 적은 뒤 한밤중에 픽업차를 몰고 로즈먼 다리까지 달려가 입구에 그것을 붙여놓고 돌아오는데, 그러한 용기와 대담성에 탄복하면서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프란체스카는 단호하게 이성을 밀쳐내면서 사랑을 만들기 위한 준비를 시작한다. 와인을 사러 40마일을 달리고, 오로지 한사람을 위해 핑크 드레스를 사고, 그와의 만찬을 위한 요리를 만들면서 모처럼 들뜬 기분이 된다. 그리고 그날 밤 드디어 둘 사이에 불이 당겨지게 되는데, 이러한 중년남녀의 격렬하고도 그윽한 사랑이 여류작가 뺨칠 정도로 섬세하게 묘사되어, 읽는이로 하여금 글 속으로 빨려들어가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난 참으로 오랜만에 나이에 걸맞지 않는 황홀감을 만끽했다. 인간은 만나고 헤어지는 일에 길들여져 있다. 하찮은 만남에서부터 살을 깎는듯한 육친과의 별리까지 살아가는 동안 숱한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면서 때론 희열하고 때론 비통해한다.

드디어 그들에게도 그러한 순간이 오고야만다. 모든것을 내팽개치고 사랑하는 사람과 떠날 수만 있다면... 하지만 프란체스카는 자신의 현재 위치를 직시하고 사랑보다는 "의무"를 택한다. 한가닥 희망을 남겨논채 떠나는 킨케이드를 눈물로 보내면서,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큰것을 잃었는지 미쳐 깨닫지도 못한다. 그리고 그가 자신과의 사랑을 영원히 숭고하게 간직하리라는 것을 짐작도 하지 못한다. 남편이 죽고 킨케이드를 다시 찾고 하는 후반과 마무리는 좀 장황했다. 한권의 책을 만들기 위해 어쩔 수 없는 노릇이겠지만 아무튼 산뜻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끝까지 책을 내려놓지 않게 만드는 힘은 있었다.

 

 

 


나는 어느편인가 하면 간결한 문장을 좋아한다. 우리나라 여류작가 중엔 글을 수식하고 그 수식한 것을 다시 수식해서 골자가 무엇인지 아리송하게 만드는 이가 있는데, 난 그런 글은 딱 질색이다. 또 무턱대고 난해한 용어를 구사하고 한글대사전의 귀퉁이에서나 찾아낼 수 있음직한 괴상한 단어를 굳이 나열하여 그럴듯하게 보이려 애쓰는 작가도 있다. 글이든 그림이든 자기 만족을 위해 만드는 쪽 보다는 일반인들이 공감할 수 있는, 그래서 그 안에서 무엇이든 얻을 수 있는 그런걸 창조하는 사람을 난 존경하고 또 좋아한다. 그런 면에서 이 작가는 내 마음에 들었다.

이 작품은 대단하지는 않다. 하지만 읽으면서 지루하지가 않았다. 어려운 글귀도 없었다. 내용도 주변에 흔히 있을 수 있는 성숙한 남녀의 사랑 이야기다. 그런데도 다 읽고 난 후 감미롭고 짜릿한 여운도 남겨준다. 마치 좋은 영화를 보고 난 뒤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자기 싫은것 처럼.

 

난 이 책을 소설이라는 걸 한번도 읽어보지 못한 사람에게 권하고 싶다. 틀림없이 그 사람은 다른 소설을 또 읽어보고 싶은 충동을 일으킬 것이니까.
-지은이: 로버트 제임스 윌러

* 이 작품이 영화화되기 전의 어느 해 가을, 중앙일보에서 독후감 모집이 있어 이 작품으로 응모했더니, 어른대접해서인지 꼬바리상을 주더군요. 후에 영화화되어 기대를 안고 보았는데, 남녀주인공이 연기는 잘하는지 몰라도 너무 늙어 실망했어요. 해리슨 포드와 미셸 파이퍼가 했으면 훨씬 좋았을걸,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현의집 주인장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