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문화원에서 "내일(あした)"이라는 영화 한편을 본 뒤, 1층 도서관에 들러 무라카미 하루키의 "회전목마의 데드히트(回轉木馬のデッドヒ-ト)"를 빌려가지고 왔다. 근데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는 영화에 관한 것이 아니고, 아니 영화 이야기도 조금은 해야겠다. 저녁을 먹은 후, 무슨 영화를 보았는지 궁금해하는 남편에게 신나게 얘기를 시작했는데, 글쎄 영화 제목이 영 생각나질 않는 것이다. 그 이상 간단 할 수 없는 "아시타"가 말이다. 그 다음부터 내 이야기는 횡설수설로 일관했다. 무대가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의 많은 섬 가운데 하나였다는 것만 정확했고, 줄거리는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중간쯤 나가다 참 그게 처음에 이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하는 식으로. 그래도 남편은 인내심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면서 뒤죽박죽 스토리를 끝까지 들어주었다.
문제는 하루키의 소설이었다. "회전목마의 데드히트"는 아홉개의 단편으로 되어 있었는데, 우선 맘에 드는 제목을 하나 골라 읽어보았더니 전에 어디서 읽은 듯 싶은 느낌이 들었다. 또하나를 골라 중간쯤 읽으니까 이건 분명히 전에 읽은 기억이 난다. 너무도 마음에 와닿는 내용이라 하루키 팬인 딸 앞에서 모노드라마까지 연출했으니 잊어버릴 수가 있겠는가. 이상하다 생각했지만 곧잘 한 작가의 단편이 저무두룩 이책저책에 중복되어 실리는 걸 알고있었기에 그럴수도 있겠지 멋대로 납득하고 나머지를 모두 읽었다.
나는 딸아이와는 다른 이유로 이 작가를 좋아한다. 그아이는 무라카미의 소설을 읽으면 자아를 발견하게 되고, 존재의 의미를 곱씹어보게 되기도 하고 뭐 그런다는데, 난 그저 그의 문체가 좋고, 또 그가 좋아하는 미국작가, 예를들어 에드 맥베인을 나도 무지 좋아한다는 동질감이라던가, 영화와 재즈를 좋아하는 분위기 등이 맘에 들어 소설보다는 기행문이나 수필을 즐겨 읽는다.
각설하고, 책을 반환하기 전에 인상깊은 단편 하나가 있어 그것을 번역해두기로 했다. 물론 서점에 가면 번역된 그의 작품이 끔찍하게 많다. 하지만 내나름대로 번역해서 하이텔 어디엔가에 올려놓으면 미처 읽지 못한 하루키 팬들이 손쉽게 읽어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싶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하루키의 문체는 까다롭지 않아 번역하는데 그다지 힘들지는 않았다.
한밤중까지 스탠드를 켜놓고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나를 보다 못한 남편이 그만 자라고 한마디 던진다.
"이 책 내일 반환해야 하니까 오늘 다 마쳐야 해요"
뒤돌아 보지도 않고 내가 대단한 일이나 하는 것처럼 큰 소리로 대답하자, 남편이 슬그머니 등뒤로 와서 펼쳐 놓은 책을 한동안 들여다 보더니,
"아주머니, 그 책 내일 반환하시구요, 나머지는 집에 있는 문고판으로 천천히 번역하시지"
세상에! 한권을 다 읽을 때까지 제 손으로 사놓은 같은 책이 있다는 걸 전혀 기억하지 못하다니.... 서글펐다. 한심했다. 그리고 마침내 병이 아닌가 걱정이 됐다...
-오래 전 어느 날의 일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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