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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이웃과 나누던 토속문화

다이어리

by yaoya 2022. 1. 26.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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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모퉁이에 있는 구멍가게를 새로 맡아 하게 되었다면서 주인이 고사떡 한 접시를 들고 찾아왔다. 아직 김이 모락모락 나는 게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돈다. 잘 먹겠다고, 앞으로 많이 이용할 테니 염려마시라고 인사말을 건네고는 가게 주인이 층계를 내려가기가 무섭게 얼른 한귀퉁이를 떼어 입에 넣었다. 간도 딱 맞는 게 참 맛이 있다. 하긴 떡 전문 방앗간에서 맞춰 온 것일테니 간이 안맞으면 오히려 이상하지.... 아이들은 신세대답게 케이크나 빵을 좋아하지 떡 같은 건 입에도 안대니 굳이 남겨 놀 것도 없다 싶어 냉장고에서 김치까지 꺼내놓고 혼자 떡판을 벌이면서 나는 까마득한 옛날, 집에서 고사지내던 어린시절을 회상한다....

 

 

사진: djricecake.com

 

 

내가 어렸을 적엔 해마다 시월 상달이 되면 집집마다 고사를 지내는 일이 중요한 연례행사중의 하나였다. 가을과 함께 맨 처음 다가오는 추석명절을 떠들썩하게 쇠고 나면 차츰 바람이 차가워지고, 그러면 어머니의 부산한 겨울채비가 시작되는데, 그 중 가장 큰 작업이 김장과 땔감 준비였다. 장독대 앞에 가지런히 김장독이 묻히고 뒤꼍에 장작이 그득 쌓이면 어머니는 겨울맞이 마지막 행사인 고사를 지내기 위해 손 없는 날을 받으신다. 고사날 아침, 마당 수돗가에 끔찍하게 많이 담가 논 쌀을 보고 눈쌀을 찌푸리던 큰오빠, 그러면 어머니는 "신세 진 이웃에게 골고루 나누려면 이것도 모자란다" 라고 말씀하셨지....

 

학교가 파하면 늘 남아서 친구들과 공기놀이를 했지만 그날만은 달랐다. 친구들의 유혹을 뿌리치고 한달음에 집으로 들어서면 팥삶는 구수한 내가 코를 벌름거리게 한다. 어머니는 시루 셋에 가득 가득 떡을 안치고, 일 도와주는 간난언니는 막걸리를 사러 달려나가고, 나는 다락에서 북어 쾌를 내려온다. 한옥에 재래식 부엌이니 큰 일을 치를 때마다 광으로 부엌으로 장독대로 수돗가로 정신없이 종종걸음을 쳐야 하지만 간난언니는 평소에 잘 보이지 않던 웃음까지 띄우며 신이 나서 일을 거든다.

해가 지고 땅거미가 밀려오면 드디어 고사가 시작된다. 제일 큰 시루에서 네모반듯하게 떠낸 떡을 쟁반에 담아 방 부엌 광 뒤꼍 장독대 등에 갖다 놓고, 남은 떡은 시루채 대청마루 한가운데에 올려 논 뒤 북어와 막걸리를 곁들인다. 대문밖에는 중시루를, 화장실 앞에는 제일 작은 시루를 갖다놓고 그 곳에도 막걸리와 북어를 얹어놓으면 준비 완료, 드디어 어머니의 치성이 시작되는 것이다. 두손을 모아 크게 절을 몇 번 한 뒤 손을 맞비비면서 귀신들에게 간곡한 부탁을 드리는 어머니, 그저그저하는 소리 외엔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는 웅얼거림이 끝없이 이어지는데, 나지막해도 고저가 있는 애절한 리듬이 어린 나와 동생에겐 색다르고 우수꽝스럽게만 들린다.

 

약 반시간동안의 치성이 끝나면 막걸리는 어머니의 웅얼웅얼 주문과 함께 대문앞 장독대 마당 등에 뿌려지고, 대청으로 거둬들인 떡을 이제 동네방네에 나눌 차례이다. 베보자기를 덮은 목판을 들고 전찻길 너머까지 가야하는 건 항상 나였다. 이건 ㅇㅇ할머님 댁에, 이건 ㅇㅇ아주머니댁에 헷갈리지 말고 전하라고 엄명이 내리는 것이다. 별이 머리 위로 와르르 쏟아져 내릴 것만 같은 싸늘한 가을 밤길, 갈 때는 긴장되어 무서운 줄도 모르지만 돌아오는 길은 으스스 겁도 나고 춥기까지 해서 나도 모르게 뛰기 시작하면 빈 목판과 접시 부딪치는 달그락소리가 밤의 적막을 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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