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의 여행사 광고를 들여다 보다가, 일본의 저렴한 벚꽃나들이 상품이 눈에 띄자 그만 허파에 바람이 들기 시작, 부리나케 여행사에 전화를 걸었다. 미주알고주알 캐묻고는 일본 비자 날짜를 확인하려고 문갑 서랍에서 여권을 꺼내봤더니 이게 웬일, 비자날짜는 아직 멀었는데 여권이 3월 10일자로 만료되어있지 않은가! 머리를 쥐어박고 싶었다. 조금만 일찍 들여다봤어도 간단히 3년 연장할 수 있었을 것을, 거금 4만여원에 사진 새로 찍어야 하고, 이런저런 서류 만들어야 하고, 아아, 그보다 어느 여행사에 부탁을 해야 한담. 저녁에 남편에게 슬쩍 SOS를 쳤더니 ,"혼자 외국 여행 다니고, 컴퓨터까지 다룰 줄 안다고 으스대는 양반이 그깟 여권신청 하나 본인이 못하시나" 라고 빈중대는게 아닌가. 나는 무안하기도 하고 슬그머니 약이 오르기도 했다. 좋다. 내가 한다. 못할것도 없지.
새로 사진 찍은게 영 후지게 나왔지만, 맞선 사진도 아니니 상관없다, 주민등록 등본에 주민등록증 앞 뒤 복사한 것, 구 여권 복사, 도장등 완벽하게 준비를 갖추고 출전용사처럼 보무도 당당히 종로구청으로 향했다. 여권신청소는 4층, 한 번에 못하고 다시 올 일이 생기면, 이 많은 계단을 또 기어올라가야 되겠구나, 생각만 해도 한숨이 절로 난다. 홀 안에는 젊은 사람들이 가득했고 창구마다 북적거렸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인상 좋은 젊은이를 골라
"신청용지 어디 있어요?"
"네, 저쪽 안내에 가시면 줍니다" 싱끗 웃는 인상이 딱 내 타입이다.
용지 한 장을 받아 들고 의자가 있는 테이블에 자리잡고 앉았다. 유리판 밑의 견본을 주시하면서 차근차근 칸을 메꾸고 나서 신청인 옆에 멋지게 싸인까지 하고 사진을 붙인 뒤, 남은 사진 한 장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다시 먼젓번 젊은이를 찾았다.
"저, 이거 어떻게 하는거죠?"
"이리 주세요, 제가 해 드릴게".
성품은 인상대로 간다. 테이블 위의 이상스런 작은 통에다 사진을 넣고 누르니까 사진이 깨끗이 도려지고, 그걸 조그만 비닐 주머니에 넣어 테이프로 붙이더니
"요기에 수입인지를 사서 석장 붙이세요"한다.
"네? 석장이라뇨?"
"45,200원 내면 석장을 주거든요. 그럼 요기에 나란히 붙이세요"
"고맙습니다. 저어, 근데 어느 여행사이신가요?"
"네, 저희 여행사는 방송국에만 드나들어서 말씀드려도 모르실꺼에요".
또 싱긋 웃는 모습이 탤런트 뺨치게 매력적이다.
나의 생활신조 중에 '모르는 것 물을 땐 꼭 젊고 날씬하고 깨끗하게 생긴 남성에게'가 있는데, 이건 외국에 나가서도 시도해봤지만 백발백중 원하는것 이상을 얻을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난 한 번도 퇴짜 받지 않고 곧바로 신청을 접수시키고 돌아왔다. 그리고 한가지를 터득했다. 무슨 일이건 직접 본인이 하면 훨씬 수월하다는 것을. 그리고 떳떳하고 자신감도 생긴다는 것을. 그날 밤 나는 남편에게 당당히 말했다.
"여보, 당신 여권 재발급 받을 땐 내가 해 드릴게, 당신은 늘 바쁘잖아"
(19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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