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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기성세대 할 말 있어요

다이어리

by yaoya 2022. 3. 8.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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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같은 전전세대(戰前世代) 인간들은 참으로 하고 싶은 말이 많다. 2차대전 중에 어린시절을 보내고 해방의 기쁨을 맛 본 것도 잠깐, 꽃다운 나이에 6 25의 비참함을 몸소 체험했고, 아무것도 없던 시절에 결혼하여 아이들을 키우던 암울했던 지난 세월, 그러는 동안 터득한 것은 오로지 인내심과 절약정신 뿐이었다.

결혼해서 5년 만에 처음으로 석유곤로에 밥을 지을 때, 그 후 또 5년이나 걸려 겨우 가스테이블을 장만하고는 원터치에 파란 불꽃이 이는 것을 보았을 때 난 얼마나 감격했던가. 그런데 요즈음은 오븐이 달린 가스렌지가 혼수의 필수 항목이라니, 정말 좋은 세상이 되었다는 생각과 함께 이렇게 편한 세월 속에 안주하면서 우리들의 불우했던 시절을 눈꼽만큼도 이해하려들지는 않고 툭하면 기성세대 운운하는 젊은이들이 야속하게만 느껴지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다 접어두고, 음식문화에 대한 이야기에 촞점을 맞추어 볼까한다. 이야기가 별수없이 또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우리 어렸을 적에는 정말 먹을 것이 귀했다. 뭐든지 제철에만 잠깐 얼굴을 비추고 사라져버리기 때문에 그때 맛을 보지 못하면 다음 씨즌까지 꼬박 일년을 기다려야 했다. 초여름에 태어난 나는 생일날 재수가 좋으면 딸기 구경을 하고 그렇지 못한 해엔 앵두화채가 고작이었다. 그래도 어머닌 봄에 캐어 잘 간수해 두었던 쑥을 넣어 쑥버무리를 쪄내고, 밤새 울거낸 발그레한 오미자물에 앵두를 띄워 아껴두었던 손님용 꿀을 한숟갈 타 주시곤 했다. 가을이 되면 어머니 일손은 더욱 바빠지신다. 끝물 가지와 호박을 떨이로 사다가 썰어 말리시고, 고추잎 데쳐 말리는 일은 햇볕 좋은 날 하루에 해내야 했다. 여름내 먹다 남은 오이지를 말려 고추장에 박아 넣고, 장마에 눅눅해진 김으로는 찹쌀풀을 발라 김부각을 만드셨다.

이렇게 어머니들은 알뜰하고 정성스레 살림을 하셨다. 그리고 우리 세대는 그 알뜰함 속에 묻혀 살았기 때문에 정성은 그네들만 못하다 해도 음식을 아끼고 귀하게 여기는 습성만은 그대로 물려받았다. 그런데 젊은 세대들은 어떤가. 그 무엇보다도 자기 몸 편한 것이 최우선이다. 김치도 사다 먹고, 샐러드 나물 부침 젓갈 등등 비닐 봉지를 가위로 잘라서 접시에 꺼내놓기만 하면 되는 완제품을 선호한다.

언젠가 30대 조카며느리하고 함께 백화점 수퍼에 들른적이 있었다. 그녀는 일순의 망설임도 없이 만들어 놓은 음식을 척척 담으면서, 느타리버섯을 고르고 있는 나에게 다가와,
"아주머니, 볶아논 것 사세요. 여기 반찬 다 맛있어요. 귀찮게 데치고 볶고 언제 하시려구요."
라고 손을 잡아끌면서 말하는 것이었다. 내 눈 앞엔 가위질만 해서 주욱 벌려놓은 밥상 앞에 앉아 있는, 일에 시달린 피곤한 조카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측은한 생각이 한동안 지워지질 않았다.

집집마다 나름대로의 가풍이 있고 또한 대대로 내려오는 그집 특유의 음식 맛이 있는데, 이렇게 아침저녁을 ready-made로 때우고,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식당 음식으로 길들여지기 시작하면 우리의 고유한, 품위있는 음식문화는 도대체 누가 어떻게 보존할 것인가. 고추장 간장까지 집에서 담가야 한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그저 남편과 자식들을 위해서 기본요리 정도는 주부의 손으로 장만하면서 자신만의 음식문화를 간직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얘기를 하고싶은 것이다.

 

 

 


어제 모처럼 경동시장엘 갔다. 나는 풍성하고 떠들썩한 시장 속에서 먹고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온몸으로 느끼며 질척거리는 좁은 골목 골목을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어 밀려다녔다. 조금이라도 크고 싱싱한 오이를 고르려고 쑤석거리다 젊은 총각한테 핀잔을 맡는 아주머니, 함지박에 꽈리고추를 수북이 담아놓고 하필이면 나란히 붙어 앉아서 행여 뒤질세라 목청껏 호객을 하는 시골티가 덜 가신 아낙들, 아무튼 생동감이 끓어 넘치는 시장분위기는 백화점 수퍼와는 너무나도 대조적이었다. 세련되고 멋진 차림새의 젊은 엄마들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고, 대부분이 나이 많은 아주머니 할머니들이라 양손에 든 장바구니가 하나같이 힘에 부쳐보였다.

도대체 저 나이에 무엇 때문에 저 고생인가. 젊은 사람은 결코 이해할 수 없으리라. 하지만 우리 세대는 안다. 비록 내 몸은 힘이 들더라도 내 부모 내 남편 내 자식들을 위해서는 그보다 더한 고통도 감수하겠다는 그들의 생활철학을. 나 또한 그렇게 바보처럼 여지껏 살아왔으니까 말이다.

당신보다 더 큰 시장보따리를 들고 낑낑대며 버스에 오르려 애쓰는 할머니 허리를 잡아 올려 드리면서, 나는 인간이 한평생 살아가는데 필요한 의식주 중에서 먹는 일이 차지하는 비중은 과연 몇 퍼센트나 되나, 잠시 생각에 잠겼다. 


-有炫之家(1990 - 풀무원 수기모집에 응모, 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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