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친구들과 모인 자리에서 노인성 치매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노망든 시어머니를 모신 한 친구의 하소연이 발단이었다. 날이 갈수록 증세가 악화되어 이젠 완전히 이성을 잃은 채 오로지 먹을 것에만 집착하시며 하루를 보낸다는 것이다. 피아노를 치며 팝송을 부르시던 분, 야구를 무척이나 좋아하셔 당신의 팬인 롯데팀이 서울에서 경기를 갖는 날이면 빠짐없이 운동장을 찾으시던 그런 분이 당신 아들도 알아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며느리를 졸졸 따라다니시면서,
"사모님, 시키신 일 다 했으니 제발 먹을 것 좀 주세요. 배가 고파요."
그러는 어머니를 바라보다가 그만 남편이 대성통곡을 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친구는 진저리를 쳤다.
남의 일이 아니었다. 우리 모두 문턱에 서 있는 것이다. 늙는 것도 서러운데 노망이라니! 우린 절대로 치매에 걸려서는 안되겠다고 이구동성으로 부르짖었다. 어떻게 하면 이 몹쓸 병을 예방할 수 있을 것인가? 저마다 그럴듯한 의견을 제시하기 시작한다. 누구는 손가락을 많이 움직이는 게 제일이라면서 피아노를 배우자고 했다. 그보다는 손쉬운 뜨개질을 하는 게 어떠냐는 친구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머리를 많이 쓰는 공부가 좋을 것 같다면서 대학교수 치매 걸리는 것 봤느냐고 들이대는 친구도 있었다.
"이 나이에 공부하자구? 냉장고 앞에까지 가서 뭣하러 왔는지 전혀 생각이 안 나는 요즘인데, 무슨 공부를 어떻게 해?"
하긴 친구와의 전화통화도 매끄럽게 되질 않는 요즈음이다. 이야기하다 알맹이를 까먹기 일쑤이고, 중요한 대목에선 단어가, 특히 고유명사가 입에서 뱅뱅 돌 뿐 생각이 나지를 않는다. 이야기도 제대로 못하겠다면서 장탄식과 함께 전화를 끊고 마는 일이 허다했다. 속 모르는 아이들은 요즘 엄마의 전화 통화 시간이 무척 단축됐다면서 의아한 표정을 짓기도 하지만...
"그러지 말고 우리 컴퓨터 배우자"
느닷없는 나의 제안에 친구들은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갈수록 태산이구나. 이젠 컴퓨터씩이나?"
"컴퓨터 배우려면 머리도 써야 하고 키 누르니까 손가락 운동도 되고... 그보다도 앞으론 컴퓨터 몰라 가지고는 이 세상 살기 힘들다던데."
"앞으로 몇백년 살 사람 같구나. 근데 비디오 예약 녹화도 못하는 우리가 그 복잡한 컴퓨터를 무슨 재주로 배워?"
"아예 난 뜨개질 쪽을 택하겠다."
우리는 한바탕 웃고 얘기를 끝냈다. 하지만 난 마음속으로 단단히 결심을 했다. 그 끔찍한 치매를 막을 수만 있다면 컴퓨터 아니라 그보다 더한 것인들 못배우랴! 다행이 내겐 훌륭한 선생님이 집에 계시지 않는가.
그렇게 해서 나는 아들로부터 컴퓨터를 배우기 시작했다. 아직 초보단계지만 그래도 간단한 것을 할 수 있을 정도가 되니 신이 난다. 우선 친지들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입력해 놓았다. 또 석간신문에 실려 있는 영어 한마디를 꼬박꼬박 타이핑하여 저장해놓고 가끔 소리내어 읽어보기도 한다. 혼자 있을 때 하니까 창피하지도 않고 재미있다. 훌륭한 회화 공부다. 어제는 문갑 속의 묵은 가계부를 꺼내어 연도별로 간결하게 정리를 하느라 꼬박 하루를 보냈다. 이제 십년 전 일이라도 키만 누르면 컴퓨터가 척척 가르쳐주리라.
그리고 때때로 글짓기도 한다. 난 컴퓨터가 글짓기 할 때 이렇게 편리한 줄은 꿈에도 몰랐다. 써놓고 난 뒤 못마땅한 부분만 지울 수도 있고, 중간에 생각나면 삽입도 하고, 필요한 한문이나 영어를 찾아서 집어넣을 수도 있고... 종이에 쓰면서 자꾸 고치다 보면 내가 써놓고도 뭐가 뭔지 도통 알아볼 수 없었는데, 화면을 들여다보면서 수십번을 고칠 수 있는 것이 그저 신기하기만 하다.
지금은 오후 두 시, 커피 한잔을 곁에 놓고 컴퓨터를 켰다. 문득 처음 컴퓨터 앞에 앉던 날이 생각난다. 우선 전원을 넣고, 노트에 아들이 말한 대로 적은 뒤 조그맣게 사각형을 그리고 버튼 표시를 하고 있는 내게,
"엄만 power도 읽을 줄 몰라요? 그렇게 적어 놓으려 하지 말고 외우세요"
하고 아들은 핀잔을 주었었지. 그래도 이젠,
"엄만 그래도 말귀를 잘 알아듣는 편이에요. 내 후배들은 얼마나 날 열받게 만드는지 모르는데."
어떤 수필가가 노년기를 "여섯시를 지나서" 라고 표현했다. 마음에 드는 표현이다. 그래, 여섯시를 지나서 잠들 때까지의 이 황금같은 시간을 슬기롭게 보내자. 시작하기에 너무 늦은 시간이란 없다고 하지 않는가. 녹슬려는 머리에 솔질과 기름칠을 하자. 그리고 자기만족을 위해서라도 열심히 머리를 쓰고 손을 움직이자. 그러면 감히 치매 따위는 얼씬도 하지 못할 것이다. 아직도 겁이 나는 컴퓨터의 윙윙 소리, 나는 이 소리가 아주 작은 음악소리로 들릴 때까지 열심히 배우고 익히리라 다짐하면서 키를 두드렸다.
-有炫之家 1994년 수필 모집 입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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