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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빛바랜 젊은날의 풍경화

다이어리

by yaoya 2022. 2. 16.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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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내일 모레면 어언 육십, 그렇지만 요즈음도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함께 조조할인 영화를 보러 갈 약속을 한다.  비디오는 성에 차질 않아 대형 스크린을 마주하러 간다고 하면 아들아이가 "대단한 정열이십니다" 라고 비아냥거린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영화는 영화관에 앉아 커다란 화면을 응시하면서,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외국어 대사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며 부지런히 자막을 곁눈질하는 동작을 한꺼번에 해야 제맛이 나는 법이다.

한창때엔 영화구경을 참 많이 하고 다녔다. 영화에 관해서는 나보다 한 수 위인 열네살적 단짝친구와 나는 토요일마다, 아니 어느땐 일주일에 두번씩도 개봉관을 드나들면서 한달치 월급을 극장에 갖다바쳤다.

 



1950년대, 우리가 젊고 싱싱하던 시절, 그 시절엔 정말 좋은 영화가 홍수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우린 그 중 한 편이라도 놓치면 큰 일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부지런히 보러 다녔다. 좋은 영화를 관람하고 나온 날은 그 여운을 곱씹기 위해 단골 찻집으로 자리를 옮긴다. 그 시절의 찻집은 남자들의 사랑방같은 것이어서 젊은 여성들이 드나드는데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다. 우린 서로 등을 떠밀며 먼저 들어가길 꺼렸다. 구석에 자리잡고 앉아 테이불 위의 커피잔을 두손으로 감싸 쥐면 은은히 피어오르는 커피향이 우리를 더없이 편안하고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지.......

그날도 토요일이었다. 평소처럼 일이 먼저 끝나는 내편에서 친구 사무실로 가야하기 때문에 시간 맞춰 퇴근을 하려는데 동료 직원이 나를 불러 세웠다. 자기 친구를 소개시켜주려고 약속을 해 놓았다는 것이다. 사무실로 찾아오는 그의 친구를 멋지다고 한 내게 농담삼아 소개해 주느니 어쩌느니 한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멋대로 약속까지 해놓을줄은 몰랐다. 잠시 망설였지만, 만나서 인사만 하고 부지런히 가면 친구 퇴근시간에 댈수 있겠지, 간단히 생각하고 동료를 따라나섰다.

그런데 하필이면 약속 장소가 음식점이어서 별수없이 점심식사를 하게 되었고,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저절로 화제가 영화쪽으로 기울고, 영화라면 딴 생각을 못하는 나는 그 남자와 의기투합하여 함께 영화구경을 하러 가게 되고 말았다. 친구에게 미안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으나 열네살적 친구의 넓은 아량에 매달려 보기로 하고, 우린 비싼 암표를 사서 구경을 했다. 다음날인 일요일에도 난 친구를 찾아가 변명과 사죄를 하는 대신 그와 만나 영화관람을 했다. 그리고 반년 뒤에 그 남자와 결혼을 했다.

그 후로 30여년이 흐르는 동안 친구들 모임에서건 어디서건 영화 얘기만 나오면 그 친구는 나를 노려 보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내가 그때 어떻게 저 애를 그냥 놔뒀는지 몰라. 글쎄 토요일이면 으례 사무실로 저애가 오게 돼있어 한시간을 기다렸지 뭐니. 너무 늦는것 같아 회사로 전화를 걸었더니 아무도 안받는거야. 혼자 영화 보러 가기도 그렇고, 오랜만에 일찍 집에 들어가 부모님께 효도나 하자 생각하고 버스를 탔는데, 무심히 밖을 내다봤더니, 기가막혀, 저 애가 어떤 멋있는 남자와 나란히 서서 웃으며 얘기를 하고 있는거야. 내 성질에 거기서 뛰어 내리지 않았던게 기적이지." 



-有炫之家 (모 사보에 기재  19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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