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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한밤중에 나홀로

다이어리

by yaoya 2022. 1. 21. 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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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의 이-ㅇ 하는 소리가 한밤의 고요 속을 멤돌고 있다. 자판에 손을 올려 놓은채 그저 스크린을 응시하고만 있는게 언제부터였던가. 나도모르게 한숨이 입을 타고 흘러나온다. 이러다간 오늘도 날밤을 새야 할까보다. 글을 쓰는 일이라는게 뼈를 깎는 아픔이라는 것은 일찍부터 알고있는 터였지만, 남이 써 논 글을 번역하는 일이 그보다 수천배 힘든 작업이라는 것을 나는 오늘에야 진저리를 치면서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 것이다.

내가 일본글을 번역하는 일을 맡은건 정말 우연한 계기에서였다. 형제들이 모인 자리에서 화제가 책으로 이어졌을 때, 외국작품은 제대로 번역이 안돼있는 것이 많아 읽기가 힘들다는 말을 내가 거침없이 내뱉은 것이 화근이었다. "그럼 네가 한번 해봐라" 라고 오빠가 지나가는 소리처럼 하기에 난 "못할것도 없지" 하고 내친김에 큰 소리를 치고말았는데, 내가 한 말에 책임을 지우기라도 하듯 오빠는 일감을 내게 떠맡겼다. 그것이 한달 전 일,그로부터 나의 각고의 나날은 시작된 것이다. 나의 자존심은 차치하고라도 오빠의 체면이 걸린 이 일을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대로 완성해야만 한다. 머리에서 떠나지않는 이 중압감은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나의 체중을 2킬로나 빼앗아갔다.

나의 작업은 주로 밤에 시작된다. 먼저 컴퓨터를 켜놓고 원고와 사전을 양 옆에 펴 놓는다. 스크린에 나타난 어제의 작업량이 너무나 적은 것에 혀를 차면서 마음을 다잡아보지만 자신이 없는건 어제나 오늘이나 다를바 없다. 원고를 읽으면서 그대로 키이를 두드릴수만 있다면.... 하지만 난 사전과 씨름을 하면서 애써 스크린에 올린 글을 지우는 일에 급급하다. 아아, 나의 무지함과 무력함. 나는 벌떡 일어나서 창문을 열었다. 달도 별도 없는 시커먼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문득 이 순간 나처럼 저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한 100명은 될까, 바보같은 생각을 해본다.

간간히 들리던 차 소리도 어느새 완전히 끊어져 버리고, 컴퓨터 소리만이 적막을 가르며 내게 겁을 준다. 엊그제 까지 밤은 내게 있어 그저 하루의 피로를 풀기위해 잠들도록 해 주는 어둠일뿐이었는데, 지금 난 그 밤을 그리워 하면서 녹슨 머리 속을 닦아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컴퓨터 자판만 보이게 얕으막히 켜 놓은 스탠드 불빛 너머로 괴물같은 내 그림자가 흠칫 나를 놀라게 한다. 난 겁먹은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다 얼른 시선을 스크린으로 옮겼다. 그래, 누가 이기나 끝까지 해 보자. 나도 오기가 있고 끈기도 남만큼은 있으니까. 오기도 끈기도 좋은데 두들겨 놓은 글에 왼 오자가 이렇게나 많담! 난 픽 웃으며 잘못 친 글자를 고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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